어이가 없는 소설 <카지노 로얄> 번역

최초의 007 소설인 <카지노 로얄>은 장편 007 소설 중 가장 작은 분량의 소설이다.
Jonathan Cape에서 나온 초판본은 총 213페이지로 되어있다.
이 소설은 내용 뿐만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도 상당히 하드보일드하다.
(당연히, 내용이 하드보일드인데, 문체가 만연체면 정말 읽기도 힘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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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로얄> 초판본 표지. 하트 덕지덕지는 플레밍 나름의 러브 소설이란 의미도 있음.


그리고, 영화 [카지노 로열] 개봉에 즈음해서 소설 <카지노 로얄>이 2006년 말에 번역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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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번역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분량이 무려 307페이지나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번역을 해서는 아무리 활자를 키우고, 줄간격을 띄우며 삽질을 해도 이렇게나 분량이 늘어날 수는 없다.
페이지수만 절반 가까이나 늘어나다니…

게다가 원판은 페이퍼백으로 크기 자체가 번역판보다 작다.
이것까지 생각하면 분량이 2배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이런 점을 눈치챈 뒤 읽어보니 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원작에 비해 전혀 하드보일드한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내친 김에 원판과 번역본의 내용을 비교해봤다.
몇줄만 봐도 늘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작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었으며, 있지도 않은 독백이 잔뜩 추가되어 있었다.

특히, 독백의 사용이 아주 두드러지는데, 줄넘김을 통해 페이지 수량을 늘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James Bond suddenly knew that he was tired. He always knew when his body or his mind had had enough and he always acted on the knowledge. This helped him to avoid staleness and the sensual bluntness that breeds mistakes.


이 몇 줄 되지 않는 내용은 아래와 같이 변질, 추가되어 분량이 늘어나있었다.

  본드는 문득 피곤에 몸을 내맡긴 채 넋을 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심했군.'
  평소에 그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그였다. 때문에 지금은 결코 그 한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본드는 나약해져 가던 자신을 바짝 곧추세웠다. 그러나 구역질나는 이 지옥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원작에 있지도 않은 독백에, 원작에 없는 수많은 부사들의 사용에 더불어 내용이 가필된 것이다.
이런 문제를 번역판 전체에 걸쳐 볼 수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설의 핵심이자 백미인 마지막 장면까지 심하게 왜곡시켜 흐름이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원작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This is 007 speaking. This is an open line. It's an emergency. Can you hear me? Pass this on at once. 3030 was a double, working for Redland.
  'Yes, dammit, I said "was". The bitch is dead now.'

영화 [카지노 로열]의 마지막 대사가 "The name's Bond, James Bond."인 것에 비해 소설은 훨씬 터프하다.
"The bitch is dead now."

하지만, 번역판은 다음과 같다.

  본드는 수화기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007이오. 일반 전화로 걸고 있소. 긴급한 용건이니 본부에 급히 알려주시오. 3030은 적국을 위해 일하던 이중 스파이라고 말이오."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그는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였던 거지. 이미 시체로 변했으니까. 안 그렇소?"
  본드에게는 수화기의 목소리가 약간 비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전화를 받는 상대가 알 수도 없는 정보(베스퍼의 배신)를 알고 있다는 것도 웃기고, 일반전화로 온갖 비밀정보를 떠드는 것도 웃기며, 내용이 잔뜩 가필된 것도 웃기지만, 근본적으로 하드보일드하기 짝이 없는 원작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꼴이 제일 웃기다.
원작의 마지막 대사는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터프했단 말이다!

이렇게 내용을 왜곡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글자수 단위 또는 페이지수 단위로 번역비를 받는 문제부터 시작일 거다.

하지만, 어떤 각도로 생각해봐도 번역자의 자질 문제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번역은 해설서가 아니다. 번역은 원작 그대로를 옮겨야 되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란 말이다! 강.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