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영화 감독열전: 가이 해밀턴


007 영화 속 제임스 본드를 창조한 감독테렌스 영이라면, "판타지 제임스 본드"를 창조한 감독가이 해밀턴이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살인번호]와 [위기일발]의 두 편은 모두 리얼리티에 기반을 둔 스파이 영화였다.
그런데, 다음 작품인 [골드핑거]를 맡은 가이 해밀턴은 영화를 판타지로 몰고 갔으며, 이 과정에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했다.
(특히, 가장 논란이 많았던 포트 녹스 내부는 완전한 상상의 무대였음)

그의 이러한 과감한 선택은 많은 이득을 가져왔지만, 그만큼 커다란 문제점도 낳게 되었다.

판타지로 바뀌면서 생긴 가장 큰 장점은 시리즈가 장기화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매번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각 편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를 찍음으로서 롱런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시리즈가 종종 막장으로 빠지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골드핑거]처럼 수위 조절을 적절히 잘 하지 못하면, [문레이커], [어나더데이]처럼 막장 영화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렌스 영[썬더볼]은 대단한 영화였음. 판타지와 스파이 스릴러를 모두 살린 걸작임)

이러한 위험의 피해자 중 한 명은 가이 해밀턴 본인이었다.

그가 다음에 감독한 007 영화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였다.
이 영화는 전작인 [여왕폐하의 007]에서 자기 부인을 죽인 블로펠드와의 처절한 복수전이 되어야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해밀턴은 그냥 덩치만 키운 판타지로 가기로 하고, 결국 가장 재미 없는 007 영화 중 하나를 만들고야 말았다.

포스터 좌우의 특공대는 결국 등장하지도 않음


그는 무어가 주연을 맡은 다음 두 작품 [죽느냐 사느냐]와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까지 감독을 맡았다.
두 편 모두 어둡고 진지한 원작을 무시[각주:1]하고 덩치만 키운 판타지로 가는데,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된다.

그나마 그에게서 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전작들의 설정을 무참히 파괴할 수 있는 뚝심 하나랄까?

- [골드핑거]: 진지한 스파이물이라는 전작의 장르를 무시한 판타지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블로펠드와 이르마 분트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한 속편
- [죽느냐 사느냐]: 코너리표 본드의 클리셰를 몽땅 걷어낸 뚝심: 담배도, 보드카 마티니도, 중절모도 나오지 않음 
-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살인면허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영화. 달랑 스카라망가 한 명만 죽임


 
  1. [죽느냐 사느냐]는 상어에게 팔다리를 뜯긴 필릭스 라이터에 대한 복수극,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MI6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제임스 본드의 돌아오기 여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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