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퀀텀 오브 솔러스] 리뷰


[퀀텀 오브 솔러스]를 다시 한 번 봤습니다.
두번 보니 처음 봤을 때에 비해 플롯의 구조가 명확히 보이더군요.

이 영화에서 촛점을 두고 볼 대상은 다름아닌 제임스 본드 자신입니다.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의 성장 드라마입니다.

전편에서 사랑에 속고 친구에 울고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제임스 본드가 정상적인(?) 스파이로 거듭나는 과정이 영화의 주 플롯이며,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했습니다.

즉, 이 영화의 특징(또는 문제점)을 단적으로 말하면 스타일리쉬입니다.
문제는, 이 스타일리쉬를 위해 007 영화에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구성이 사라져버렸단 것입니다.

오히려 악당도 악당보단 악동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고, 퀀텀이나 그린의 작전이 붕괴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덕분에 무엇보다 마무리가 엉성해져버렸습니다.

물론, 액션이 전반부에 집중된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한편으로는 EON에서 처음부터 명확하게 2부작인지 3부작인지 또는 영화의 목적이 뭔지 등을 제대로 정하지 않았단 인상도 듭니다.


1. 계속되는 클래식으로 귀환

[퀀텀 오브 솔러스]는 [카지노 로얄]에 이어 클래식으로 귀환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인번호]의 앞은 아니라는 선을 그으려 합니다.
(EON 프로덕션 제작 순서로서 뿐만 아니라 기존 작품 중에선 내용상으로도 최초의 007 영화입니다)

a. 발터 PPK

[살인번호]에서 본드는 발터 PPK로 교체하며, 이후 거의 007 영화에서 PPK를 사용하다 P99로 교체합니다.
그런데, [카지노 로얄] 프리타이틀 액션에서 본드가 P99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퀀텀 오브 솔러스]에선 오히려 PPK를 사용합니다.


PPK가 클래식 본드의 클리셰 중 하나란 점을 생각해보면 클래식으로 귀환은 하되, 굳이 [살인번호]의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만 따르겠다는 점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b. 정치적으로 중립이 아닌 007

또한, 정치에 휘말릴 일 없이, 악당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정치적 중립을 유지했던 기존 시리즈와 달리 정치적 상황에 깊이 관여하고 휘말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점 역시 소설의 제임스 본드는 정치적으로 중립이기는 커녕 각국의 스파이 세계나 정부들과 얽혀있던 소설 속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전작 [카지노 로얄]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클래식 007의 모습을 더욱 발전시킨 점이라 보여집니다.

제임스 본드의 진정한 최강의 적은 퀀텀이나 그린 플래닛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이란 핑계 하의 정부차원의 도덕 불감증이나 이권다툼이란 해석은 007의 캐릭터를 잘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수자원공사의 민영화 등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도 있어 공감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c. 건배럴 씬

영화를 본 분들이 꽤 지적하신 것이 건배럴 씬이 촌스러워 보인단 점입니다.
사실 21편의 007 영화에서 건배럴 씬은 건배럴의 입체감이 더해지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피의 색상도 바뀌는 등 변형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퀀텀 오브 솔러스]의 건배럴 씬은 오히려 1960년대 느낌이 나더군요.
이는 촬영기술이 떨어져서나 감각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의도적이 아닐까 합니다.


d. 복수의 귀환

소설 속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복수에 목숨을 거는 편입니다.
<살인번호>의 스트렝웨이즈, <죽느냐사느냐>의 필릭스 라이터(상어에게 뜯김), <두번산다>의 아내 등 가능한 복수는 꼭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 부분은 상당부분 희석되고 희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살인면허] 단 한편에서만 다뤘던 복수의 코드가 돌아왔습니다.
신출내기 00요원 제임스 본드의 가슴은 뜨거우며, 그는 잊지 않고 복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유어아이즈온리]에서 블로펠드를 대충 해치우는 모습과 비교되더군요)


2. 어쩔 수 없는 단점들

a. 마무리가 안 됨

영화의 주적인 그린에 대해서도, 그린의 배경으로 밝혀지는 퀀텀에 대해서도, 본드는 변변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린과 듀얼을 뜨기는 하지만, 그 듀얼이 어디 제대로 된 듀얼이기나 하냐 말이죠...


또한, 전작인 [카지노 로얄]과 함께 [퀀텀 오브 솔러스]는 007의 성격이 형성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는 영화들입니다.
하지만, 본드가 여자에 대해 시니컬하지만 냉소적인 모습을 갖게되는 여운을 남긴 전작과 달리, 복수의 화신이 되고, 냉정함을 되찾는 과정의 마무리가 빠져버려 여운을 찾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습니다.


b. 도미닉 그린의 카리스마가 전무함

그린의 하는 짓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하는 짓과 비슷합니다.
조커가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배트맨을 적으로 돌리게 만들어 배트맨을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커는 남들을 조종하는 것과 별도로 카리스마 좔좔 이었는데, 그린은 도통 카리스마라곤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그린과의 듀얼은 더욱 와닿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린의 똘마니 바가지 머리가 어이상실로 제거되는 바람에 더욱 없어보입니다.


c. 이젠 슬슬 퇴직하셔야 할 것 같은 M

[카지노 로얄]에서 가장 어이가 없던 것이 모든 배우를 교체했는데, 정작 M을 교체하지 않았단 점입니다.
결국 M 역을 맡은 주디 덴치 여사는 [퀀텀 오브 솔러스]에선 74세의 고령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나이라 그런지 의외로 연기도 약해보이고 카리스마도 없어보입니다.
(재떨이 던지는 장면에서 건강이 걱정되시더군요…)
[골든아이]에서 칼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던 61세의 M은 이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원조 버나드 리의 경우 [살인번호] 때에 54세였고, 마지막 작품인 [문레이커] 때엔 71세였습니다.)


d.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화재 건물 탈출씬

이전 글에도 언급했지만, 이 장면은 [뷰투어킬] 시청씬 오마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건물 탈출씬은 다른 액션장면에 비해 긴박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중간에 벌어지는 그린과의 듀얼은 그린의 바닥 수준의 카리스마와 함께 마지막에 힘을 빼버리는 원인입니다.


3. 그 외의 사실들

a. 다니엘 크레이그는 총 5편의 007 영화를 계약함

다니엘 크레이그가 차기작에 대해 알 수 없단 얘기를 했다고 교체를 걱정(또는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크레이그는 총 5편에 대해 계약을 했기 때문에 EON에서 제작을 하지 않는 이상 교체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참고로, 티모시 달튼은 원래 87~93년의 6년간 4편을 계약했지만, 여러 이유로 제작이 지연되며 2편밖에 못 찍은 것입니다.
이젠 그 때와 같은 법정소송은 발생할 리가 없으므로 달튼과 같은 전철을 밟을 리는 없습니다.

b. 호텔 로비에 있던 여직원은 찰리 채플린의 손녀 키에라 채플린임

c. 제작 노트에 의하면 필즈 요원의 풀 네임은 스트로베리 필즈(딸기밭)임



d. 그린의 부하에게 준 본드의 명함에 적힌 이름은 R.Stirling임

이 이름은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본드의 가명으로 사용되었던 로버트 스털링(Robert Stirling)을 연상하게 합니다


e. 엔딩의 사막 액션은 최초 알프스를 배경으로 기획되었음

[여왕폐하의 007]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 아이디어가 기각되었는데, 사막 한가운데 있는 생뚱맞은 호텔보다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ㅠ.ㅠ

f. 소설에서 제목을 따오긴 했지만, 제임스 본드를 제외한 소설 <퀀텀 오브 솔러스>의 어떠한 설정, 등장인물, 장소 등 단 하나도 쓰이지 않음

g. 2008년은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태어난지 100주년되는 해임 (1908년 5월 28일 생)

h. 제임스 본드는 총 11명의 악당을 살해했는데, 전체적 평균 수준(편당 10.5명)임
    참고로 [카지노 로얄]에선 10명을 살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