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final/4)

제 4 부 : CIA와 KGB의 치열한 첩보전
 

브레즈네프가 2~3주만 더 살았다면

  CIA는 안드로포프의 오른팔이었던 고르바초프가 급부상하는 것을 무척 반겼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과감성과 용기, 결단력 등 그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그가 가졌던 과감성과 용기와 비전의 모순점도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우리는 일부 이슈에서 그를 과대평가하기 일쑤였고 반대로 다른 중요한 이슈에서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의 政敵들은 고르바초프의 신임이 두터웠던 야코프레프가 CIA의 첩자였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절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CIA의 첩자가 아니었던 게 너무나 다행스럽다. 이들은 너무도 훌륭하게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관심은 높았지만 그에 대해 환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도 전형적인 공산당 간부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스타프로폴에서 시작, 모스크바로 오기까지는 공산당 이념가 미하일 수슬로프와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1978년 농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지 1년 만에 공산당 간부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1980년 약관 49세에 공산당 최고간부회의의 정회원이 된다. 흐루시초프나 브레즈네프처럼 고르바초프도 집권하기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특히 1979년부터 4년여동안 농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4년 연속 흉작을 맞아 대규모로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등 소련 농업기반 붕괴의 장본이었는데도 무사했다.
 
  사실 그는 1982년 11월 17일로 예정됐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숙청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위원회 소집 1주일 전 브레즈네프가 죽고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2~3주만 더 살았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CIA는 1985년 2월 5일 고르바초프가 체르넨코 서기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확신했다. 체르넨코의 후임으로는 고르바초프와 로마노프가 거론되고 있으며 고르바초프가 선두주자라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고르바초프는 현실적이지만 외교 경험이 전무하며 기본 정책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유연한 이미지를 풍기는 정치인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소련의 비밀 테러 공작

  고르바초프는 창의력이 넘치고 활동적인 공산당이었지 혁명가는 아니었다. 고르바초프에게 아이디어는 풍부했지만 전략은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문제에 관한한 확고부동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레닌이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야말로 지상 최고의 정치 기구라고 생각했고 7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 집권층에 의해 왜곡됐다고 믿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조금만 손보면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경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부패척결, 알콜 추방, 공산당 재건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새로운 기술 개발을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요술 방망이라고 여겼다. 그는 집권하는 동안 자기 의도와는 반대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의 소련 사회를 바꿔놓았다.
 
  결코 원하지 않은 변화였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번 해보고 안되면 조심스럽게 다른 방법을 적용해보고…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식이었다. 그는 점진적 개혁가였지 일순간에 모든 것을 바꾸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자기를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어준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1985년 3월 우리는 소련이 駐서독 미군 병사들에 대해 테러 공격을 준비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소련에서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KGB는 서독 미군 기지 주변에 병사들의 출입이 잦은 디스코텍이나 술집을 파악, 폭발물을 설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CIA는 KGB가 노렸던 디스코텍이나 술집 14군데를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 미군병사들이나 나토군 병사들이 다니는 곳들뿐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소련이 2년 전부터 이같은 테러 공작을 준비해왔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레이건 대통령, 부시 부통령, 슐츠, 와인버거 등에게 돌렸다. 당연히 백악관 강경파들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며 對蘇 강경론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에 변화의 바람은 조금씩 일고 있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정치 행태가 과거 소련 집권자들과는 달랐다. 또 고르바초프는 군축문제에 대해 레이건에게 수시로 편지를 띄웠다. 입장변화는 없었지만 대화를 희망한다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해 5월 슐츠와 그로미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 11월 양국정상회담에 대해 협상했다.
 
  7월 3일 제네바 양국 정상회담이 공식 발표되던 날 고르바초프는 그로미코를 셰바르드나제 조지아주 공산당 서기로 전격 교체한다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CIA는 슐츠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셰바르드나제는 무서운 업무 추진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용기있고 똑똑하며 창의력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밖에도 셰바르드나제는 매우 청렴한 공직자였다. 아무리 출세가도를 달려도 처음 살던 아파트에서 그대로 살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슐츠와 셰바르드나제는 그해 8월 처음 만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CIA와 KGB의 '유치한' 대결

  두 슈퍼 파워 간의 긴장감이 가시고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지만 정보 전쟁은 치열했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 KGB나 CIA 모두 상대방을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비밀 공작을 벌였다. 일부는 매우 심각한 공작이었고 또 일부는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장난같은 공작들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유럽 배치에 반대하는 모임은 반드시 후원했다. 미국의  SDI를 무력화 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KGB는 유럽에서 슐츠, 케이시 또는 미군 고위 장성들의 서명을 위조한 서류를 만들어 우방국에 뿌리고 다녔고 아프리카에서는 CIA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동남아에서는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에 관여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실제 1985년 KGB의 최우선 과제는 간디 총리의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제3세계에서는 미국이 갓난 아기를 납치, 미국으로 데려가 장기를 떼어낸다는 터무니없는 흑색선전을 만들어 유포하고 다녔다. 이같은 터무니 없는 소문들은 반미감정을 자아내기도 했고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에도 사실인 양 퍼지고 있다.
 
  하지만 CIA도 바랐다. 포피엘리우스코 신부의 초상이 담긴 엽서 4만 장과 그의 강론을 담은 유인물을 폴란드로 밀반입했다. 포피엘리우스코 신부는 비밀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숨진 인물이었다. 교황도 나중에 이 유인물을 보고 매우 흐뭇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그 해 5월 폴란드와 벨기에 간에 열린 축구 시합에서 자유노조 시위를 주동했다. 심지어 폴란드 국영 TV에 3m 짜리 대형 플래카드가 보도될 정도였다. CIA는 또 나치 독일의 요아킴 본리벤트롭 외무장관이 1939년 9월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과 가진 회담에서 폴란드 분할에 사용한 지도를 극비리에 입수, 대량 축소 복사한 뒤 폴란드에 뿌렸다. 민족감정을 자극할 것은 물론이었다.
 
  CIA는 또 1985년 미소 정상 회담이 열린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의 방문이 환영받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CIA는 제네바에서 反蘇 시위, 反蘇 회의, 反蘇 전시회 등이 열리도록 후원했다. 또 소련의 캄보디아에서의 역할을 공개해 여론의 주목올 받도록 했다. CIA는 이밖에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는 각종 시위와 회의, 전시회 등을 물밑 지원했다.
 
  냉전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정도로 중대했던 공작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소련의 인권 탄압 문제를 부각시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고 소련의 폴란드 침공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공작마저 없었더라면 소련의 정책들은 영원히 베일에 가려졌을 것이다.
 
  CIA는 공개적으로도 소련에 대한 공작활동을 벌였다. 가장 대표적이었던 것은 소련이 1985년 일본과 서방국가들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훔친 사건을 언론에 대서특필토록 한 일이었다.
 
  CIA는 1981년부터 서방 정보기관들과 협조해 소련이 서방국가들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입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2년여 동안 정보를 수집하던 중 정보원으로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정보원은 소련 당국에 발각돼 처형됐다.


소련의 '기술 도둑질' 백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소련의 '도둑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프랑스 정보기관은 1984년 12월 소련의 이같은 활동으로부터 서방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공개하자고 제의했다. CIA는 1985년 여름 소련의 '도둑질'에 대한 백서를 만들었고 조지 부시 부통령은 이를 들고 7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을 찾아가 지지를 얻어냈다. 그해 9월 국무부와 국방부는 백서 5만 부를 전세계에 배포했다.
 
  CIA는 또 1985년 초 유엔 사무처에 파견나와 있는 8백명의 소련 국적 보유자를 일일이 추적하는 작업을 벌여 이들이 소련 외무부로 직접 보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무리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소련 외무부, 정보부, 공산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유엔에서 자국 이익을 위해 일한 꼴이었다. 이들 중 약 25%가 KGB 요원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고 상당수가 KGB의 조종올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상원을 자극했고 의회도 5훨 비슷한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지만 소련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고 KGB가 예전대로 공작을 하는 한 CIA 도 맞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데탕트가 무르익어도 냉전은 계속됐던 것이다.
 
  소련 국적을 가진 유엔 사무처 인원 8백명을 놓고 CIA와 국무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방은 곤란했다. 소련에서 반드시 보복조치를 단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소련에 있는 미국인보다 미국에 있는 소련인이 수적으로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추방 조치를 하게 되면 불리한 것은 미국쪽이었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의회와 국가안보회의였다. 케이시 부장은 슐츠가 안 움직인다고 사적으로 비난하면서도 또 슐츠를 전폭 지원하는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쌨다.
 
  케이시는 1985년 4월 26일 슐츠에게 "패트릭 리히 상원의원과 빌 코헨 상원의원이 8백명 문제에 대해 국무부에 문의했으나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며 나를 찾아왔다"는 메모를 보냈다. 즉 국무부가 비협조적이라면서 슐츠를 간접 비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또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혀 그를 두둔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그해 8월 소련의 유엔 대표부 인원 270명을 이듬해 4월까지 170명으로 줄이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이같은 대통령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3월 7일까지 소련측에 통보하는 것을 질질 끌었다.
 
  CIA와 KGB가 대결하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상대측에 첩자를 심어두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ClA가 한 수 위인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70년대 중반 젊은 CIA 요원 윌리암 캄필레스가 최첨단 인공위성 기술을 3천 달러를 받고 팔아먹은 사건이 있었지만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5년 CIA도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해 10월 美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간첩혐의로 구속되더니 ClA 계약 근로자가 체코 정부에 비밀을 팔아먹은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가장 큰 사건은 존 워커 사건이었다. 미해군에 복무하던 워커는 17년 동안 해군의 암호체계를 소련측에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이는 美 해군의 일거수 일투족을 노출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무렵 소련은 ClA 내부에도 첩자를 만들어 놓았다. CIA의 소련 첩보활동의 실무 담당자였던 알드리치 에임즈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1994년 체포되기 전까지 1급 비밀을 소련측에 넘기는 바람에 CIA가 소련에 침투시킨 정보원 9명 이상이 발각돼 처형됐다.
 
  이떄까지만 해도 CIA는 에임즈가 고급정보를 넘겼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특히ClA의 1급 정보원이었던 아돌프 톨카체프가 KGB에 의해 처형됐을 때도 KGB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랐다. 그는 소련의 항공우주 계획 및 각종 무기 개발 정보를 CIA측에 넘겨줬던 인물. 그의 신원이 발각되자마자 소련측은 모스크바 주재 美 대사관의 폴 스톰바우그도 추방했다.

 
유르첸코의 망명

  그러나 7월과 8월 서방 국가들도 '대어'를 낚았다. 그해 7월 영국정보부는 영국 주재 KGB 지국장이던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를 모스크바에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고르디에프스키는 1974년부터 영국 정보부의 정보원으로 있으면서 각종 소련 첩보 활동 사항을 넘겨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 KGB 지국장을 지내면서 의심받기 시작했고 급기야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조사를 받고 집에서 대기하던 고르디에프 스키는 7월 19일 KGB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조깅복 차림으로 집을 나와 사라져 버렸다. 영국은 9월 12일 고르디에프스키의 망명을 발표했고 케이시 부장은 하루 전 이 사실을 레이건에게 보고했다.
 
  8월에는 미국이 한 건 올렸다.KGB의 美 첩보활동 책임자였던 비탈리 유르첸코 장군이 로마에서 미국으로 망명해왔다. CIA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KGB의 고위 간부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현재 진행중인 첩보 활동 사항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르첸코는 KGB에서 장군으로 진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망명했던 터라 정보가 많았고 그만큼 이용가치가 높았다. CIA가 그토록 바라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케이시는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손에 쥔 듯 좋아했다. 그는 유르첸코에 대한 조사 과정을 일일이 챙겼다. 그에 대한 조사 내용은 거의 일일 보고사항이 되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CIA가 한 건 올렸다는 것을 자랑하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에도 보도됐는데 아마도 케이시가 흘리지 알았나싶다. 당시 언론과 의회로부터 곤욕을 치르던 케이시 부장은 CIA 의 '한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모면해볼까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9월이 되면서 소련이 샴페인을 터뜨렸다. 유르첸코 조사과정에서 신원이 발각된 전직 ClA 요원이 FBI의 감시망을 피해 모스크바로 망명해버린 것이다. 1981년 ClA에 들어온 에드워드 리 하워드는 蘇 첩보 담당자로서 모스크바 파견에 앞서 각종 對蘇 첩보작전에 대해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관문인 거짓말 탐지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 마약 복용에다 폭음 경력 등 사생활에 문제가 많아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앙심을 품고 KGB 측에 정보를 팔아먹은 것이다.
 
  유르첸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워드의 이름이 떠오르자 FBI는 美 뉴멕시코주에 거주하는 하워드를 밀착 감시했다. 그러나 그는 CIA에서 배운 대로 FBI를 따돌리고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부인에게 차를 운전하도록 하고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하워드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자기와 똑같은 복장을 입힌 마네킹을 조수석에 놓아 두었던 것. 이 모든 게 1분이 채 안 걸렸다.


하워드 사건이 가져온 파문

  FBI는 두 사람이 계속 차를 타고 가는 줄 알고 뒤쫓다가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하워드 때문에 對蘇 첩보활동은 완전히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워드 때문에 톨카체프가 처형됐는 줄 알았다.
 
  하워드 사건은 국내적으로 ClA에게 많은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보수파들은 CIA의 對간첩활동이 느슨하다면서 질타했다.
 
  불행히도 하워드 사건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11월 2일 유르첸코의 재망명 사건이 일어났다. 조지타운에서 저녁식사를 위해 나갔던 유르첸코가 소련대사관으로 걸어들어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왜 그가 망명했는지 의구심이 일었지만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 11월 25일에는 국가안보국(NSA)에서 14년 동안 근무하다 1979년 은퇴했던 로날드 펠톤이라는 자가 소련측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적발됐다. 유르첸코의 도움으로 그를 적발해냈지만 그는 그동안 가장 민감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을 망신시킨 워커, 하워드. 콜카체프. 유르첸코. 펠톤 등 이 외에도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젊은 ClA 요원이었던 샤론 스크라네이지가 가나 정부에 고용됐던 남자친구에게 정보를 넘겨주다 적발됐다.
 
  美해군 정보분석가였던 조나탄 폴라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간첩활동을 하다 발각됐다. 또 오랫동안 ClA 요원으로 활동했던 래리 우타이 친이 중국 공산당을 위해 스파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 처벌받았다.
 
  1986년에도 대간첩작전은 계속됐지만 1985년 만큼이나 사건이 많았던 해도 없었다. 1986년 8월 23일 유엔에서 근무하던 소련 과학자 게나디 자하로프 박사가 FBI에 의해 구속됐다. 외교관 면책 특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는 FBI의 덫에 걸린 사례였다. KGB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와 관계 없는 미국시민을 구속할 계획이었다.
 
  KGB는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이었던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誌 니콜라스 대니로프 기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대니로프는 정보원과 접촉,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소련의 정보를 넘겨받다가 붙잡혔다.
 
  대니로프가 ClA의 첩보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강력하게 대니로프의 석방을 요구했다. 9월 12일 대니로프와 자하로프 박사는 결국 각자 대사관에서 석방됐고 자하로프 박사는 부인과 함께 미국 이민이 허용됐다. 그리고 10월 12~13일 두 나라는 아이슬랜드 레이캬비크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대니로프 기자의 역할

  슐츠가 소련측과 협상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CIA가 대니로프 기자 몰래 그를 첩보활동에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9월 8일 슐츠에게 CIA의 입장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ClA는 1981년 소련 전략 미사일의 배치도를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았다. 너무나 소중한 정보였지만 누가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985년 1월 22일 대니로프 기자는 1개월 전 만난 적이 있는 포템킨 신부라는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보낸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1월 24일 우편물을 받아든 대니로프 기자가 겉봉투를 뜯어보았더니 또 다른 봉투에 美대사 앞으로 전달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美대사 앞으로 보내는 봉투 안의 내용물은 또 다시 CIA 국장 앞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이 겉봉투의 글씨는 1981년 글씨와 똑같았다. 대니로프 기자는 이 봉투를 대사관에 갖다 주었다.
 
  CIA 지국장은 누가 포템킨 신부를 통해 정보를 가져다 주는지 꼭 알아내려고 했다. 대니로프 기자와 두번째 만나면서 포템킨 신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3월 23일 우리 요원이 우편물을 전달한 적이 있다는 포템킨 신부를 만났다. 우리는 포템킨 신부에게 제3의 인물에게 전달할 편지와 함께 연락처를 남겼다. 대니로프는 4월 초 포템킨 신부로부터 접선이 안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대사관 직원에게 이야기했다.
 
  대니로프는 그러면서 공사에게 스파이 활동에 관여하기 싫다고 밝혔다. 4월 18일 모스크바에 있는 ClA 요원은 편지가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됐고 KGB측에 들어갔다고 전해왔다. 9월 9일 케이시는 슐츠와 상의한 후 소련 대사관 측에 대니로프의 무죄를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