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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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방장관은 로버트 게이츠입니다. 2006년 연말(정확히는 12월 18일)에 조지고 부시는 미대통령의 단짝이었던 럼스펠드의 후임자로 취임하였습니다.

이 양반 경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냉전시대였던 1969년에 CIA에 들어가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CIA에서 생활하다가 CIA 국장까지 지냈고, 퇴임 이후에는 Texas A&M 대학 총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게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권력기관 최상부에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뭉친 무개념 정보국장아닌 사람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 분이 약 10여년 전에 적은 글인데, 주간동아에서 읽은 글이라고 기억됩니다. 내용이 읽을만 해서 옛날 홈페이지에 올렸었는데, 원체 관리도 하지 않는 홈페이지고, 글 내용은 아까워서 블로그에 옮깁니다.

※ 원제는 From the Shadow이고, 음지에서(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는 당시 번역 제목입니다.
    이미지는 원래 홈페이지에 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사진은 책을 스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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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 Gates
, Former director of the C.I.A.(Central Intelligency Agency)
  •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약속한 것이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됐다
  • 카터의 인권정책은 소련의 급소를 강타
  • 아직도 풀리지 않은 냉전시대의 미스터리, 교황 암살기도 사건
  • KAL 007사건은 냉전시기 최후의 위기
  • 쫓고 쫓기는 CIA와 KGB의 스파이 전쟁

로버트 게이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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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CIA본부, 백악관에서 13Km 거리다

로버트 게이츠 미 중앙정보부(ClA) 부장은 1969년 CIA에 발을 들여놓은 뒤 30여 년 동안 줄곧 권력의 핵심에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닉슨 대통령시절 백악관과 첫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키신저가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회의 자문위원이던 74년 백악관으로 스카우트 돼 냉전시대 미국의 對蘇 정책 수립에 관여했으며 이후 백악관 내에서도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이 바뀌어도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어도 카터 대통령의 對蘇 정책은 그대로 유지됐으며 그 결과 소련이 붕괴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게이츠는 또 미국의 정책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3년 9월 대한항공 격추사건 때 美행정부 내에서 국무부와 CIA간의 견해차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했다. 당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CIA가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흥미롭다.
이밖에도 게이츠는 이 책을 통해 교황과 크레믈린간의 비밀 접촉. CIA 부장과 KGB 의장의 비밀 회담. CIA와 KGB간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스파이전을 자세하게 다루었다.
美캔사스 州 출신인 게이츠는 인디애나大를 졸업하고 미공군에 입대, 군복무를 마친 뒤 ClA에 들어가 근무했고 1991년 11월부터 1993년 1월까지 CIA 부장을 지냈다.






제 1 부 : CIA의 위기
 

대통령 6명 모셔

  나는 린든 존슨부터 조지 부시까지 6명의 대통령을 모셨고 8명의 ClA 부장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등 4명의 대통령 밑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 참모로 활동했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는 CIA 차장을 지냈고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국가안보회의 부의장과 CIA 부장올 역임했다. 1969년 ClA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20여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CIA는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했고 대통령 없이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의회나 행정부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CIA는 닉슨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자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닉슨의 약점이 CIA의 약점으로 나타났다. 닉슨이 보호해주지 못하고 포드가 보호해줄 수 없는 CIA는 발가벗겨졌다.

  그전에도 ClA는 쿠바 침공 때 실수를 했다. 그러나 번번이 대통령이 막아줬다. 하지만 1973년 초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 진행중이고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렴 ClA는 비판적인 추적기사, 호전적인 의회, CIA를 싫어했던 대통령 등을 상대해야 했다.

 
시련의 시작

  시련은 1973년 초부터 닥쳤다. 前 CIA 요원이 CIA 장비를 이용, 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침입해 서류를 훔쳐간 게 신문에 나면서부터였다. 국방부 기밀을 언론에 흘렸던 데이비 엘스버그의 정신과 의사였다는 게 드러나면서 문제는 커졌다.

  슐레진저와 월리엄 콜비 부장은 5월 9일 모든 현직 CIA 요원에게 과거 CIA의 탈법 또는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아는 대로 진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죽을 쑨' 경우까지 포함해 693쪽이 나왔다. 나중에 이는 CIA의 가보(家寶)로 불렸다.

  콜비 부장에 따르면 그 가보에는 '혼란 작전'이 포함돼 있었다. '혼란 작전'이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대한 미행, 정부 취재원을 캐내기 위한 언론인 미행, 워터게이트 관련자 파일 작성, 극비 의약품 실험, 카스트로 등에 대한 암살계획 등을 말한다. 그같은 내부 명령을 내리자마자 슐레진저는 국방장관으로 영전하고 콜비가 부장직을 승계했다.

  콜비 부장에 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의회는 '家寶'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다 1974년 12월 18일 뉴욕타임스의 소이머 허쉬 기자가 콜비에게 전화를 걸어 '흔란 작전'에 대해 기사를 쓰겠다고 통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콜비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 사실은 12월 22일 뉴욕타임스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됐고 정가를 강타했다. 1975년 1월 15일 '家寶'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됐다. 청문회 기록이 공개되자 또 한차례 난리가 났다. 공개되지 않은 CIA의 탈법적 행태가 더 있다고들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美상원은 정보수집과 관련된 정부 부처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했고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때마침 CBS 텔레비전의 저녁뉴스 시간에 방송된 CIA의 암살계획 프로그램으로 온 나라는 CIA 히스테리에 휩싸이게 된다.

  1975년은 CIA 창설 이래 최악의 해였다. 베트남이 무너졌고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앙골라에서는 내전이 터졌다. 이밖에도 군축협상, 터키 문제 등이 계속 터지는데도 고위 관계자들은 연일 청문회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콜비 부장도 일주일에 수차례씩 의회를 오가며 증언해야 했다.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CIA에 관한 것 중 스파이 요원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공개되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위원회의 조사 결과 'CIA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적법하게 움직였다'는 면죄부가 주어졌으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언론에서는 CIA와 관련된 일이라면 확인도 없이 무조건 톱뉴스가 됐고 정치인들의 안주감이 됐다. 75년 12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처드 월치 CIA 지국장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소련이 아직도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CIA의 필요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ClA는 대통령의 오른팔이었고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의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면 ClA의 행동반경도 함께 축소된다. 따라서 1975년 이후 언제부턴가 CIA는 대통령과 의회의 중간쯤에서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따르되 의회의 허락 없이는 잘 안 움직이는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CIA 고위 관계자들은 이후부터 모양새는 이상하지만 대통령과 의회, 두 상관을 모시는 것을 당연시했다.

 
77년 백악관 지하 사무실로

  나는 1976년 대통령 선거 이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ClA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우선 지미 카터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새로운 진용이 갖춰질 것이고 기존 멤버들은 당연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남이 떠밀어내기 전에 내가 스스로 떠나고 싶었다. 나는 3년 동안의 백악관 생활을 마치고 다시 ClA 로 돌아와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아론 NSC 부의장이 1977년 5월 5일 NSC로 다시 돌아오겠느냐는 제의를 했을 때 선선히 수락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브레진스키 NSC 의장과 아론 부의장은 취임과 동시에 NSC 운영 메커니즘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해고해버려 일을 할 수 없다면서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론을 만났고 브레진스키와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스텐스필드 터너 신임 CIA 부장이 반대했다.

  브레진스키가 ClA를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접 정보보고를 하는데 내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오해는 플렸고 나는 5월 23일 백악관 지하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3명의 대통령 밑에서 4개의 사무실을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브레진스키와 아론에 대해 호감이 갔다.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일하기에는 편했다. 브레진스키는 특히 비서, 경호원, 청소부 등 하급 직원들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일과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신사였지만 일과 관련이 있는 한은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터너 신임 ClA 부장은 브레진스키가 오전 6시 30분에 정보보고를 을린다는 대통령의 시간계획을 보고 발끈했다. 터너 국장은 대통령에 대한 정보 보고는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브래진스키는 터너의 요구가 당연하다고 옹수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통령의 스케줄에 명시했던 6시 30분 보고를 '국가안보 브리핑'으로 고쳤다. 터너 부장이 낄 틈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린 것이다.
 

머리 좋은 독서광 카터

  브레진스키는 매사 깔끔했고 정확했다. 그는 학자 시절 소련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고 전략적 접근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에 관한한 실용주의자였다. 평생 교수였던 그는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마치 테니스 게임에서 이기듯이 상대방을 이겨야 했다. 때론 이같은 성격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민감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와 토론하기보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을렸다. 보고서를 받아든 그는 토론할 때보다는 훨씬 더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카터 대통령의 안보팀에서 가장 실용주의적이고 객관적 판단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브레진스키가 키신저 前 국무장관과 라이벌 관계라고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브레진스키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간의 관계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테니스를 치는 등 매우 원만한 편이었다. 소련에 대해서도 둘은 많은 부분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당연히 개인적인 감정도 좋았다. 하지만 권력과 야망과 영향력이라는 세속적인 문제 때문에 둘 사이는 달라 보였다. 특히 소련에 대한 접근법을 놓고 둘 사이에는 깊은 철학적 차이가 있었다.

  밴스는 전략군축협상(SALT)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브래진스키가 소련과의 마찰을 일으켜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브레진스키는 군축협상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입장이었다. 충돌해야 할 때는 충돌하고 대화할 때는 대화를 한다는 게 브레진스키의 생각이었다.

  아론(NSC 부의장)은 브레진스키와는 판이한 사람이었다. 서류 정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같았고 또 그만큼 서류를 싫어했다. 성격도 불같았고 입이 험했다. 하루는 하도 욕을 해대니까 먼데일 부통령이 그의 사무실까지 와서 문을 쾅하고 닫아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1년 비엔나에서였다. 키신저 NSC 의장과 함께 군축협상 대표로 참가할 때였다. 그는 복잡한 일을 단숨에 간단하게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소련에 대해서만큼은 강경파였다. 2년 반 동안 백악관에 있으면서 두 사람이 의견 충돌을 보인 때는 소모사 정권 말기 니카라과에 대해서 뿐이었다.

  카터에 대해서는 잘 파악이 안됐다. 아마 IQ만으로 따진다면 카터를 따를 대통령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닉슨처럼 유머감각도 없었고 백악관 참모들에게도 매우 냉정했다. 카터 대통령은 의사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본 사실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들은 이상하게도 전체적으로는 정치적 알맹이도 없고 방향감각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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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카터 대통령과 인사를 하는 게이츠. 우측에 브레진스키가 보임.

  그는 독서광이다. 브레진스키는 대통령에게 두꺼운 보고서를 들이밀면서도 늘 앞의 두서너 장만 보면 된다고 일렀지만 카터는 보고서 맨 끝부분의 오탈자까지 지적해낼 정도였다. 우리는 때로 그를 '미국 최고의 문법학자'라고 표현했다. 그 는 ClA의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 부인 로잘린 여사의 이름 철자가 틀렸다는 것까지 지적해냈다.

  소련이 닉슨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그가 소련과 동반자 관계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닉슨의 이런 정책이 소련 집권충에 대한 정통성을 국내외에 보여준다고 믿었다.

  둘째,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의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 외무장관이었던 그로미코는 "두 국가간의 사회구조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대화가 꼬인 적이 없었다"면서 "닉슨은 이론에서 벗어나 늘 실용적인 측면에서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닉슨이 떠나고 나면서 미국의 정책은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