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에서의 Casino Royale(2006)의 의미

007 소설 원작자인 Ian Fleming의 시리즈 중 가장 먼저 집필된 것은 CR입니다.
그리고, Casino Royale에는 베스퍼 린드와의 관계 등 제임스 본드의 성격을 규정짓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영화 시리즈 중에 Casino Royale이 없었다는 것은 (시리즈의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 있어 커다란 맹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소설 Casino Royale은 2번이나 영화화 되었습니다. (1954년, 1967년)
Barry Nelson 주연의 1954년작은 TV판 단편이었고, David Niven이 주연한 1967년작은 패러디 영화로서 오스틴 파워의 원전 쯤에 해당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1967년작 [Casino Royale]은 원래 Sean Connery를 영입해서 찍으려고 생각했다가 EON에서 반대하자 아예 패러디로 방향을 바꾸면서 007 계의 재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EON 입장에서는 축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천국"씬은… 작품의 정체성이 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는 컬트적인 장면입니다.

2002년 [Die Another Day] 개봉 이후 EON에서는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비록 엄청난 수입(1억 6천만 달러를 긁어들였습니다)을 올리기는 했지만, 평가는 대단히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했다고 불매운동이니 뭐니 하면서 평가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CG로 떡칠된 화면이며, 대한민국과 북한에 대한 어줍잖기 짝이 없는 묘사에(이 정도의 고급 영화라면 고증은 필수입니다) 배신과 복수의 코드를 전혀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화면 구성 등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뮤직비디오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하긴, 감독이 뮤비 감독 출신인 리 타마호리인 점도 고려해야 됩니다만...

결국, 이 영화의 흥행 성공 비결은 단지 Pierce Brosnan의 소설에서 집어 꺼낸듯한 외모(그러면서도 느껴지는 Sean Connery의 카리스마 느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EON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초심 즉, 원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Casino Royale의 판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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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돌아간다면 과연 어디로 돌아가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지금의 James Bond라는 캐릭터는 영화화가 시작된지 40년이 지났으며, 최초의 작품인 [Casino Royale]을 이제야 영화화하는 관계로 정체성이 모호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에는 그 특유의 냉소적인 농담은 별로 없습니다. 냉소적인 농담은 최초의 007 영화인 [Dr. No]를 감독한 테렌스 영의 특기였는데, 이게 영화판 본드의 성격으로 확립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제임스 본드로 갈 것이냐, Sean Connery의 제임스 본드로 갈 것이냐가 초심의 핵임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EON은 가장 현명한 선택 즉, 둘 모두를 수용하면서 둘을 한 점에 접합시키는 선택을 합니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EON은 몇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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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에서 플레이보이 스파이가 보입니까?

1. 주연배우의 교체


우선 주연배우부터 교체하게 되는데, 보증된 흥행수표인 Pierce Brosnan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새로운 배우를 찾습니다.
(지금은 대성공임이 확인되었지만) Daniel Craig의 기용은 논란이 많았고, 푸른 눈동자에 대한 불만부터 수동 변속기를 운전하지 못한다는 루머까지 그를 헐뜯는 온갖 루머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젊은 얼굴과 근육질의 몸매는 Sean Connery의 느낌으로 돌아가기 위한 EON의 고심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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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4번째가 Sean입니다

Sean Connery는 처음에는 잘생기고 카리스마 있는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기용되었을 때는 정장이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촌뜨기"에 불과했습니다. (오죽 어색하면 테렌스 영 감독은 슈트 입고 잠도 자라는 지시까지 내렸겠습니까)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근육질 몸매와 외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는 그가 그저 촌뜨기로 끝날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Daniel 이전의 4명의 James Bond 역을 맡은 배우 중에 근육이 (조금이라도) 잡힌 배우는 Pierce Brosnan이 유일했습니다. 그런 배우들이 Sean Connery의 뒤를 이었고,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Q의 특수장비들이고요.


2. 액션 스타일의 전면 교체

주연배우의 교체보다 더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액션입니다.
007 시리즈 뿐만 아니라, 요즘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종종 사용하는 수법이 CG입니다.
(하늘에서 헬기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헬기를 3D로 그리는 것이 훨씬 싸고 안전합니다)
사람들마다 호불호의 차이는 있지만, 007 최악의 CG는 [Die Another Day]의 패러세일링이라고 생각합니다.
[Die Another Day]에서는 펜싱 격투장면 이후에는 변변한 액션이 아예 없습니다.
카 체이스는 너무 장비가 많아서 뮤직 비디오 느낌이었죠. (게다가 투명 Aston Martin까지...)

하지만, [Die Another Day]와 같은 해인 2002년에 개봉한 본 슈프리머시에서는 리얼리티 액션이 왜 필요한가를 멋지게 보여줍니다. 영화 속의 스파이는 최후의 순간에는 1:1로 몸싸움 벌이는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 묘사가 너무 멋졌던 것입니다.

사실 이전에도 CG vs 스턴트맨의 비교는 종종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이라] 시리즈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입니다.
미이라는 물론 CG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존스는 몽땅 대역입니다. 실제로, 존스 시리즈의 액션은 스턴트맨들끼리 경쟁하듯이 찍은 장면이 상당부분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낸 스턴트맨이 그 장면을 찍는 "권리"는 누리는 방식으로 찍은 것이죠.
그 결과, [미이라]는 블럭버스터 히트 작품이 되었지만, [인디아나 존스]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또한, [벤허] vs [글라디에이터]도 비슷합니다.
물론 [글라디에이터]는 대작임에 분명하지만, 액션 장면의 거칠기는 [벤허]를 따를 수 없습니다.
[벤허]에는 커다란 격투 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리고, [Casino Royale]에서의 액션은 몽땅 스턴트 액션입니다. CG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크레인에서의 고공 액션, 계단에서의 사투, 애꾸눈 킬러 게틀러 일당과의 격투, Aston Martin이 옆으로 굴러가는 장면, 비행기 엔진 뒷바람에 자동차가 날아가는 장면 등 핵심 액션은 그야말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방식으로 촬영되었습니다.

그 결과 [Casino Royale]에서 Daniel Craig는 Sean Connery를 능가하는 터프함을 보여줍니다.


3. 기존 영화보다 소설의 성격을 표현

소설 007과 영화 007의 가장 큰 차이는 성격입니다.
소설에서는 비정하고 냉정한 킬러의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내면의 갈등과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007은 그저 여유 있는 스파이의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Sean Connery 시절에는 비무장인 적의 등을 쏠 정도로 비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느 액션영화와 차별성이 없는 영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화 CR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즉, 소설에서 묘사한 "비정한" 모습과 "고통받고 갈등하는" 모습으로 돌아감으로서 원작에 훨씬 가깝고, 실감나게 와닿는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Casino Royale]는 소설의 성격을 다시 받아들이면서도, Sean Connery의 aura가 느껴지는 영화의 처음([Dr. No] 시절 분위기)로 돌아가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게 된 것입니다.

이제 CG와 유들유들한 농담을 버린 새로운 본드가 Bond22를 곧 촬영하게 됩니다.
터프한 본드의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